우성 김종영 선생은...

우성 김종영 선생은 창원이 낳은 한국 현대조각의 뿌리이자 추상조각의 선구자이다. 선생은 1915년 지금의 소답동 생가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집안 대대로 시서화에 능통하던 가풍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아 어렸을 때부터 시, 서예,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930년에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김종여은 나중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초대학장이 된 미술교사 장발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미술의 길을 본격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1932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국 학생서예실기대회에서 안진경체로 일등 수상을 했고 1933년 무렵에는 다수의 유화를 그렸다. 1936년 도쿄미술학교를 입학하여 현대 조각을 접하게 되었고 콜베, 부르델, 마이욜, 부랑쿠시 등의 추상조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41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창작에 몰두하다가 귀국하여 1948년 서울대학교에 미술과가 생기자 장발, 장우성 등과 함께 교수가 되어 정년(1980)까지 재직하였다.
한국 최초의 조각 전공 교수가 되면서 1953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고 한국미술협회 대표위원, 한국디자인센터 이사장을 거텨 197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82년 67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한국현대조각의 선구자 - 선생은 1953년 영국 런던에서 주관하고 전 세계에 공모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전에서(3천5백점 출품된 작품 중에 30점 선정) 입상되어 국제적 조각가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한 손을 턱에 괴고 서 있는 여인의 나상이네 볼륨이 극한으로 된 것으로, 무엇인가 깊이 고뇌하고 사색하는 듯한 표정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선생은 이 작품에서 외형적인 형상의 재현이나 모방인 구상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 후 추상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추상미술의 강력한 옹호자인 영국의 비평가 하버트리이드가 '무명정치수를 위한 모뉴망'이란 주제를 걸고 개최했던 이 전시회를 통해 나움, 가보, 알렉산더, 칼더, 바자렐리, 마이코, 버틀러, 밍구찌등의 20세기 추상조각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선발되었다)

선생은 국제적으로 상파울로 비엔날레전(1965), 유네스코 초청 파리, 로마 미술연구 및 사찰(1968~1969)을 통해 작가적 명성을 높었다. 선생은 일생동안 오로지 두번의 기념탑 제작에만 참여했는데 1958년 포항의 '전몰학생위령탑'과 1963년 파고다 공원의 '3.1운동 기념탑'이다. 선생의 위치로 보아서는 자신이 원했다면 수많은 기념물을 남겨 놓을 수 있었을텐데 오로지 두 점의 탑만을 남겨 놓았다는 것은 선생의 작가정신이 청렴했음을 엿볼 수있다.
이러한 선비적 정신은 1959년 장우성 화백과의 2인전, 1975년 회갑기념전, 100여점의 조각품을 한 자리에 모은 1980년 4월의 국립현대 미술관에서의 정년퇴임 기념을 위한 대 회고전 외에는 개인전을 갖지 않았다. 장우성과의 2인전은 유럽 현대조각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로 호평을 얻었고 결국 선생은 인체를 완전히 버리고 추상적 형태로 바꿔나갔다.

선생의 작품은 - 구체적 형상이 없이 절제, 단순화되고 하나의 전체로서 다가오며 덩어리로서 인상된다. 작품의 모든 세부는 구성의 통제 안에 있고 구조적 상형으로서의 추상조각을 대표한다. 그것은 '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나의 예술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표현과 기법은 단순하기를 바란다.' '무엇을 만드느냐 보다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고 작품이란 미를 창작하는 것이라기보다 미에 근접할 수 잇는 조건과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는 선생의 말에서도 느껴질 수 있다.
'자연의 물체가 자연스럽게 있듯이 나의 조형세계도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선생의 조형적 논리는 작품의 재질에 높은 인식을 가져 돌, 브론즈, 나무, 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고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현재 김종영 선생의 작품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과에 160여점이 조각작품과 서예작품, 그리고 2천900여점의 드로잉과 서양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경남 창원시 소답동에는 생가가 있다.